Go Back to Mourning Heat(열곡(熱哭))(2024)
기술 시대에 들어선 이래 매개자로서의 정체성은 한층 더 강화된 형태로 자기 존재를 표상하게 됐다. 그러한 현상은 기계 장치를 활용해 대량 생산의 양식 구조를 실현하는 “중간(milieu)” 위치에서 초래한 주체 계층의 위상 형성 법식과 연관이 있을 건데, 그로부터 개별의 주체들은 합의된 형식으로서 집단화된 세계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가운데 자연스레 하나의 체계를 자기 구축하는 과정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형성된 비가시적 총체는 제 직조의 목적을 시스템 유지를 위한 특정 범주의 당연한 상황으로 전제하는 일에 다시금 메타 활용됨으로써 소위 ‘안정적인’ 해당 조직의 관리를 곧 존재 이유로 삼는 것으로 자기 순환의 구조를 완결해 내었다. 이상의 순차에서 일정한 체계란 우선 그것이 형성되고 난 후로는 돌이킬 수 없는 존재의 의미를 자동으로 자가 생산하는 것이 그 어떤 일보다도 가장 중요한 임무가 되어버린 실사를 조명할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건 여기서 발생하는 ‘동기화(activation)’ 행위의 수행으로, 특정한 감정을 당시 가장 효과적인–한 때 그것을 ‘미적 환영’이라 호명하기도 했던–형식으로 향유하기 위한 장치(apparatus) 모델의 개발이다. 이렇듯 너무나도 인공적인 범주에서의 결과물이 이성 혹은 객관과 같은 차원의 경로를 지나며 그 무엇보다도 비인간적임을 외연하게 되는 건, 바로 그러한 구조의 자기 추동식 메커니즘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제 중요한 과제는 이와 같은 물적 체계의 현장에서 필연적 조건으로 정체화(identification)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 그것이 당대 적절한 또는 그렇다고 통상 여겨질 수 있는 환경을 참작해 현실적 스펙터클의 형상을 조형하는 일일 테다. 대중이라는 사회 규범적 틀로 한정하는 일반성의 영역에서 무엇을 매개하는 행위 그 자체가 하나의 유효한 수행으로 비치는 상황이란, 특히나 예술의 장을 중심으로 하는 대체의 관계와 연관이 있다. 이렇게 조장된 요건이 사회 일반의 층위에서도 무방해야만 함은 그 체계의 견고함, 그 축조의 공식과 역시나 얽혀 있다. 물론 특정한 시공에서 확증된 사례로서 이를 인정 하는 단계의 자명함은, 환언해 애초에 설정된 규범을 향한 태도의 결심이 그만큼 지당한 것이라고도 하겠다.
김보은의 작업은 관계를 그린다. 그것은 구태여 형성되지 않아도 되었을 법한 것으로부터 반드시 형성되어야 했을 필연적 정도에 달하기까지, 꽤 넓은 분포의 파장을 포함하는 관계의 한계를 가늠하고, 또 넓혀 내려 한다. 이 확장의 기조는 작가가 연출하는 극적 수행의 양식을 지지체 삼아 그 현시의 모델과는 어쩌면 이질하다고도 할 수 있을 확실함의 태도로 관계의 지향을 역설한다. 그가 주목하는 관계란 매체로서의 신체를 바탕하고 있다. 감각이라는 차원은 그렇게 신체의 속성을 기반적 조건으로 적극 전제하며, 그로부터 시각, 촉각, 청각, 후각 등 원초적인 기관의 활용을 종용한다. 그 조합의 목적에 따라 특정한 공감각의 기류가 형성되며, 이는 곧 그것을 체험하는 예술 환경 와중에서 역시나 서로 다른 객체 사이의 관계 성립 가능성을 새로이 형성한다. 그와 같이 관계를 상기하는 일은 또한 이렇듯 비가시적일 수밖에 없는 그 안정성의 불안정성을 현상화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파편화된 피부 조직이나 순식간에 증발해 버릴 호흡 또는 때에 따라 변동하는 체온과 같은 흔적이나 부분으로의 신체 속성에 기반해 구축된 관계를 논하는 김보은의 작업은 바로 이상의 이유와 연관이 있어 뵌다. 다만 그것을 작품의 형태로 포집하는 일은 이제껏 퍽 이상적인(ideal) 정도를 나름의 준거로 상정하는 듯한데, 이를 위해 작가는 경화(硬化)의 방식을 빌려 그 감각적 성질의 보전을 추진해 왔다.(〈무제(호흡)(Untitled(Breathing))〉(2019)과 〈”호흡–주조”를 위한 실험(An Experiment for "Breath-Casting"〉 연작(2019) 그리고 〈오직 보는 것에 적응된 이들을 위한 보조적 감각 장치(Assistive Feeling Device for Those Who Are Used to Only Seeing)〉(2023)나 〈흐르는 몸들(Flowing Bodies)〉(2023) 등의 경우) 이렇듯 그 일회성으로 인해 명료한 시효를 내재하는 관계에 견고함을 부여하려는 그의 시도는 신체의 감각 혹은 감각으로서의 신체를 인식하는 것이 개인의 주체성을 정체화하는 동시에 그 개별 주체들을 사회 구성을 위한 동력으로 다시 삼는 자기 순환적 사회 구조의 체계를 조명한다. 어쩌면 작가는 그러한 재매개적(re-mediated) 방법론의 추구를 통해 관람의 주체를 자신이 목표하는 이상적 관계 맺음의 순간으로 인도하며, 그로써 체제 층위에서 성취 가능한 연대의 청사진을 가늠하는 것도 같다.
김보은의 최근 전시 《꼬리를 삼키는 연습: Mourning Heat(애도의 열기)》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설치 작품 〈Mourning Heat (When a Breath Resonates)(애도의 열기(호흡이 공명할 때)〉(2024)는 전통 장례 문화인 ‘대곡(代哭, 대신 울어줌)’–과장된 곡소리로 남은 자들의 슬픔을 해소해 주는–이란, 일종의 대리적 카타르시스(catharsis)의 행위로부터 기획된 연출로, 작가는 발열 장치와 세라믹 재질의 원통관으로 인공적인 울음의 소리를 내어준다. 무한한 순환의 구조로 자기 충족의 완전함을 상징하는 ‘우로보로스(Ouroboros)’를 연상케 하는 전시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작업을 통해 삶과 죽음의 상반적 순간을 합치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도록 함으로써, 마치 종교적 내세(來世)의 현실적 필요 목적과도 유비하는 일정한 사상적 거리를 생성한다. 이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무한한 주체로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철학의 역사적 계보를 우리에게 떠올리는 한편, 그와 함께 삶이라는 다단하고 복잡한, 형이상학적이면서도 물리적인, 독립적이면서도 집단적인 어떤 구조체의 실체를 폭로키도 한다. 작가의 미적 서사를 좇아 그렇게 우리는 불변하는 몇몇의 사실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를테면 순환 불가능한 존재로서의 인간(그리고 제 신체(성))와(과) 그리고 그와는 무관히 환원하는 총체로서의 세계, 나아가 관련한 개별 주체들을 함께 포함하는 채로의 그 관계 설정에 관한 문제가 바로 그것일 테다. 이러한 사유 방식은 전체적으로 세계의 층위를 확장하는 효과를 창출하며, 더불어 우리의 위상을 필멸할(immortal) 것이면서도 때로는 불멸한(mortal),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른바 “사이–존재(Dasein)”의 자리로 내몰아간다.
이처럼 김보은의 작업은 대리 매개의 방식을 설계자의 태도로 수행하면서, 그로부터 자기 존재의 개념을 시공의 한계를 초월하는 현실적 실재로 받아들이도록 한다는 데서 인상 깊다. 그런 맥락에서 결국 태어남으로 인해 곧 죽음을 향해 질주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적 의미를 당대적으로 그리는 그의 작업을 ‘경로적’이라 칭할 수도 있겠다. 살아가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만, 여전히 그러한 삶을 택할 자유를 갈망하는 우리 존재의 운명을 수동적인 상태로 그저 받아들여야 할 것이 아닌 능동적 의지의 범주로 전치하려는 작가의 작업은 그것을 위해 우리 인간 존재와 그 삶의 형식을 돌이킬 필요 충분한 틈을 확보해 내고 있다는 데에서 분명 의미가 있다.
장진택(동시대 예술 연구자, 독립 큐레이터)